한때 여러가지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고,
고민을 하게 되면 늘 책을 장바구니에 넣게된다.
물론 그책을 모두 사는 것은 아니다.
(재정의 문제도 있고, 공간의 문제도 있기 때문에)
그러나 당시에는 상위권에 랭크되어있던 책이고,
아마 책 제목이 굉장히 도발적이라서 당시에 구매했던것 같고,
침대곁에 두었다가 문득 생각나서 책을 읽게 되었다.
정말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, 그리고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?
이 책을 보다보면 저자의 많은 고민들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.
큰 이름으로 묶어 두었지만,
날짜를 기록하여 저자가 언제 이런글들을 기록했는지를 잘 보여준다.
그 글을 보다보면 오래된 시간부터 최근의 시간까지 글을 모아서 묶어 두었다.
표지는 알라딘 캡쳐
책의 저자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것들을 질문하지만,
우리에게도 늘 당연한 것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.
예를들어 적폐란 무엇인가? 우리는 왜 사는가? 위력은 또 무엇인가?
이런 질문들을 던진다.
다양한 질문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,
책을 보다보면 웃고 즐기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.
(사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죽음을 생각해야하니까)..
또 일부 주제들은 생각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,
조금은 깊은 생각을 하고 싶은 책이라면 한번쯤은 볼만한 책이다.
다만 이러한 책 주제들의 단점이 그래서 하고싶은 말을 구체적으로 하면 뭔가? 라는 질문을 던지면
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.
책을 읽으면서 몇 문장을 발췌하였다.
“과거의 향기는 기억속에만 존재할뿐, 마법을 써서 돌아간다 해도 같은 향기를 반복해서 음미할 수는 없다”
“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. …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.”
이런 말은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
현재를 집중하고, 조금더 나은 미래를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면에서는
희망적이기도 하고, 추천할만하기도 하다.
그러나 여전히 과거는 늘 힘이 있고,
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살게하는 힘이기도 하다.
그러나 내가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
” 인간은 구원되었다.
행복하다고 말할때 많은 경우 대상으로부터
자신이 거리를 유지할때라기보다는 기꺼이 스스로 목메고 싶은,
스스로 그것 때문에 부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어떤 대상을 찾은 경우다.
고전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인 셈이다.
그 사랑의 대상이 신이든, 어떤 대의든, 어떤 연이이든간에“
이 부분에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의하기는 어렵다.
기독교적 관점에서 구원이란,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이다.
즉,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.
그러나 이책도 꽤 오래 되긴했지만, 현재 지식인들이,
그리고 지식층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.
잘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추기도 어렵다.
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의 말을 빌려보자면, “어떻게든, 된다.”